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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 본문
조선의 공주 . 문종의 적장녀이며 단종의 친 누나.
남편은 영양위 정종. 소생으로 아들 정미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출생
세종대왕 재위시, 아버지 문종이 아직 세자 자리에 있을 때 세자의 후궁인 승휘 권씨의 딸로 태어났다. 세자빈 봉씨가 동성애 혐의로 폐위되자 경혜공주를 출산하여 생산 능력을 입증한 어머니 승휘 권씨가 세자빈에 올랐고, 경혜공주는 세자의 적녀가 되어 '평창군주'에 봉작되었다.
어머니인 세자빈 권씨는 1441년 남동생 단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문종은 재혼하지 않았으며,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는 세자의 단 둘뿐인 적자녀로서 상당히 귀하게 자랐으리라 짐작된다.
혼인
세종 32년 16세 나이로 혼사가 결정되어 정종(鄭悰)과 혼인하였고, 이에 정종은 임금의 사위에게 내리는 영양위(寧陽尉)라는 봉호를 받는다. 혼인 결정 후 2달도 되지 않아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승하하여 궁에서 하가하지는 않았다. 혼인할 때 그녀는 아직 왕녀가 아니라 세자의 딸인 군주의 신분이었기에, 부마 후보들을 궁에 모아놓고 간택하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세종의 용태가 위중하였으므로 국상을 맞기 전 얼른 적당한 명문가의 아들을 골라 혼인 결정만 해놓은 것이다.
이후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고 경혜공주(敬惠公主)에 봉작되었다. 그리고 궁 밖에 공주방을 마련하여 하가하였고, 이때 공주의 살림집을 마련하느라 30여채의 민가가 헐렸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헐린게 민가라고 해서 그저그런 초가집 30여 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때 공주의 집은 당연히 궁 근처의 부자 동네에 지어졌고, 실제로 양덕방(陽德坊)의 민가들이 철거되었다고 실록에 나온다. 당시 양덕방은 한성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였다. 양덕방은 오늘날 종로구 계동 및 가회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그렇다. 바로 북촌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평창동이나 성북동의 호화 저택 수십 채가, 공주가 분가하느라 철거되었다는 의미다. 이때 문종은 "다시 조사해 보니 5채만 허물었다고 하던데? 그리고 어차피 고위 관료들이라서 다른 집에 가서 살 수가 있는데 뭔 상관이냐?" 라며 반박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30여채가 아니라 5채가 맞을 것이다. 조선은 왕궁이 아닌 이상 99칸이라는 한계가 존재했기에, 대저택을 30여채나 허물었으면 99칸을 훨씬 초과하게 된다.
비극적인 삶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승하하고, 남동생인 단종이 즉위한다. 단종은 궁을 떠나서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의지할 가족이 1명도 없는 궁궐보다는 그래도 가까운 사이인 친누나의 집이 더욱 편하게 느껴진 모양. 실록에서는 "주상께서 영양위의 집에서 지내시는게 편안해 하시니, 당장 수강궁(창경궁)으로 돌아오실 필요는 없다"는 의논도 나온다.# (단종 1년, 7월 10일(을축) 1번째 기사)보통 국왕이 궁궐을 떠나서 사저에 장기간 지내면 경호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신하들도 되도록 빨리 환궁할 것을 종용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런 의논이 나올 정도면, 단종이 누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계유정난 당시에도 단종은 누나인 경혜공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난이 일어나 숙부인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고 결국 단종은 세에 밀려 1455년 상왕으로 물러난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편인 혜빈 양씨[4], 금성대군 등을 귀양보냈고, 이 과정에서 공주의 남편인 영양위 정종도 유배당했다. 경혜공주는 자청하여 남편의 귀양지로 따라갔고, 첫아들 정미수를 유배지에서 출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공주의 신분이었고, 그녀 자신은 죄인이 아니기에 유배지에서도 종을 부리는 등 최소한의 품위유지는 한 듯하다.
사육신의 난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정종의 유배지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진다. 공주도 역시 남편과 동행하였다. 이후 정종은 공공연히 세조에게 반감을 품은 발언을 하고 다녔고, 결국 세조 7년(1461)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능지처참되었다. 경혜공주는 남편이 사형당할 때 임신 중이었다.
야사에서는 순천이나 장흥의 관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나오나, 실제로는 공주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순천의 관노가, 순암집에는 장흥의 관노가 되었다고 씌어 있지만, 2012년에 발견된 경혜공주 사망 3일 전에 작성된 재산 상속에 관한 기록인 분재기(分財記)에서 그러한 야사가 허구라는 게 확실히 입증되었다.
실록에서는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몹시 가난하여 세조가 노비를 돌려주고 내수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게 했다는 기록이 사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세조와 정희왕후도 공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 해에 바로 서울로 불러들였으며, 정희왕후가 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궁궐로 데려와 길렀고, 공주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정종의 집안인 해주 정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종 처형 당시 경혜공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조는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했는데,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정희왕후가 손을 써서 여장을 시키고 궁에서 키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남자애 티가 나자 세조가 이상하게 여겼고, 그제서야 정희왕후는 사실을 고백했다.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남자아이로 기르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미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정미수와 여동생의 이야기를 혼합해 만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정미수는 이후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과 같이 자랐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돈녕부 벼슬을 한다. 이때 정미수가 죄인 정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맹렬한 반대 상소가 올라오지만, 성종은 세조의 뜻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정미수를 파직시키지 않았다.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경혜공주는 성종 4년에 사망하였다. 경혜공주가 죽은 다음 날 성종은 호조에 명해 이런저런 물자를 내려주라는 명을 내린다.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하고 있다. 공주의 묘 옆에 작은 봉분이 하나 있는데 이건 남편 정종의 단(가묘)이다. 그런데 이 묘는 문화재나 도 기념물 등으로 지정되지 않아서 찾기가 매우 어렵다. 가보면 보통 유명인사 묘역 주변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나 안내석도 하나 없을 정도. 그래서 묘 입구에 있는 공주 내외의 사당인 충민사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아무래도 공주의 남자 이전에는 대중적으로 관심 밖이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인 듯. 공주의 묘 바로 아래에 성종의 서자인 이성군의 묘가 있는데, 이성군묘로 가는 이정표는 있어도 경혜공주묘로 가는 표시는 없다.
미디어매체의 경혜공주
한명회, 왕과 비 등 단종과 관련된 사극들에서 남편 영양위와 조연으로 등장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홍수현이 열연하였는데, 뛰어난 연기력과 실제 경혜공주의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메인 여주인공보다 감정이입이 더 잘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남편 영양위와의 애절한 사랑과 세조의 횡포로 몰락해 가면서도 공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혜공주가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시청률은 평균 2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