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음력 5월 22일에 발생한 쿠데타로, 후대의 5.16 군사정변과 함께 한국사 사상 가장 대표적이면서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군사정변이었다. 한국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진년에 벌어졌기에, 훗날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들을 책봉했듯이 무진년의 회군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명(明)나라와 철령위(鐵嶺衛)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고려에서 우왕과 최영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요동 정벌에 대한 정벌 의지를 표명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자, 군대를 이끌고 있던 사령관인 이성계(李成桂), 조민수 등의 무인들이 국경지대 압록강의 섬 위화도까지 북상했다가 이내 역심을 품고 회군, 개경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최영을 패배시키고 조정을 장악한 사건. 곧이어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 등이 폐위, 살해되는 등 무진회군의 주역들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반란수괴 이성계는 조민수 등의 경쟁자를 모두 숙청하고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신진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에 오르게 된다.
원인
1388년,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요구로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라는 친서가 전해졌다.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이같은 요구가 이르자 명나라와의 실력 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1369년(공민왕 18)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왔는데, 우왕 때의 친원정책 이후 명나라는 무리한 세공(歲貢)을 요구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수였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1360~70년대 초에 고려는 이 지역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까지 통치 영역을 넓히고자 세 차례 출정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다.
과정
1388년은 우왕의 심복인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해였다. 우왕의 왕권을 위협하던 집권세력인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이 제거되고, 우왕의 왕권을 지지하는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이제는 권력의 핵심에서 신진사대부(개혁 성향 선비그룹)의 뒷심으로 되어가는 이성계의 제거였다.
마침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가 생겨나 요동 정벌이라는 정치적 빌미가 생겼다. 하지만 공민왕 시대부터 성리학에 의한 정치적 개혁을 외치면서 우왕의 사부였던 이색(李穡, 1328 ~ 1396)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에 오른 신진사대부가 이성계에게는 우호적인 데 비해 최영에게는 적대적이었다. 변수는 여기서 갈라져 작용하고 있었지만 우왕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조민수의 휘하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조전원수 최공철 등이 소속되었고, 이성계의 휘하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 안주도상원수 지용기, 조전원수 배극렴, 이지란(이두란), 이화 등이 소속되었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우왕과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과섭찰리사 김완을 보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송도(松都, 개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고양)에 귀양 갔으며,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1][3]
사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결과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 중에서 급진 개혁 세력이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가 확립되었다. 공민왕 후반부터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과 동맹관계를 통해 확실한 세력범위를 설정할 수 있었지만 고려의 충직한 신료로 대표되는 최영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았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즉, 우왕 즉위 초 당시의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최영 정권과 대립하였다. 이후 북쪽에서 홍건적, 남쪽에서 왜구가 침입하자 최영,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최영·이성계의 연합으로 이인임 일파가 제거되자 정도전과 조준이 이끄는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고려의 충직한 신료로 대표되는 최영을 배척하고 최영 축출·우왕 폐위 → 조민수 축출·창왕 폐위 → 공양왕 옹립 등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후 신진사대부들은 기반을 공고히 한 이후에, 과전법을 실시하여 후에 개국공신이 되는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적 개혁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1392년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를 요구하여 조선이 개국하게 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