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차 왕자의 난

카우보이 비밥 2016. 3. 7. 23:25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직접 왕이 되진 않았으므로 완전히 쿠데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기는 하나 이 난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조선 2대 왕 정종이 이방원의 등극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맡았으므로 사실상 쿠데타나 다름이 없다.


이성계의 후계자는 누가 될것인가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50대 후반이라 후계자를 생각해야 할 나이였다. 때문에 개국한지 한달쯤 지난 1392년 8월 20일에 태조는 정도전남은,조준배극렴 등을 불러 세자 책봉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이방석이 있다. 이 중 여섯째까지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일곱째와 여덟째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책봉 당시 이방번은 12세, 이방석은 11세로,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스무 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 둘째 이방과와 다섯째 이방원은 조선건국 과정에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운 바 있다.

세자책봉 당시 태조의 아들들
모친신의왕후 한씨신덕왕후 강씨
이름이방우이방과이방의이방간이방원이방연이방번이방석
나이39세36세33세29세26세20세~25세12세11세
특이사항은둔공훈공훈요절책봉된 세자


본래대로라면 장남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겠지만, 그는 조선이 건국될 기미가 보였을 때부터 가족들을 데리고 철원 보개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은거하고 있다가 태조가 함흥에 집과 땅을 주자 함흥으로 가긴 했으나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지내는 상태였다. 정통성이 가장 큰 인물이 사실상 세자가 될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누구를 세자로 삼아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공신들은 처음엔 적장자 계승 원칙에 따르거나, 공이 있는 아들 중에 선택하여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적장자 계승원칙과 건국 당시 세운 공에 따라서 후보는 둘째이지만 사실상 첫째로 있는 이방과와 다섯째인 이방원이 후보로 압축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성계의 아들 중 조선왕조 설립에 가장 큰 공이 있었던 둘째 아들 이방과와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있었음에도,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소생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이방번과 이방석 둘이 있었는데 처음엔 이방번이 형이므로 이방번을 밀다가 공신들이 차라리 신덕왕후 소생을 세울거라면 이방석(의안대군)을 책봉하라고 하자 막내아들을 세자로 세웠다. 이러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이복형들이 불만을 품고 그 중 한 명인 정안대군 이방원이 주동하여 일으킨 쿠데타가 1차 왕자의 난이다.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각종 드라마나 매체 등의 내용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난해한 요소들이 다수 포착된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하륜 등은 확실히 이방원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남은,심효생,정도전,이제,유만수,변중량 등과 당시 왕씨 학살에서 유일하게 일부 생존해 활동하던 개성 왕씨들도 전부 살해했다, 이방원의 두 이복동생들 이방석,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고 훗날 우의정에 오른다, 영안대군 방과는 반란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달아나 숨었고, 익안대군 방의와 회안대군 방간은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당시 제일 정통성이 큰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빠르게 투항하여 살아남았다 궁궐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 등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전원이 이성계가문 가별초(사병)들인 것 등이 모두 사실이다. 

추정되는 전개과정은 오랜세월 이성계 가문에 충성했던 가별초들이 박위의 명령에 순종하며 이방원에게 칼을 빼들고 화살을 쏘았을 가능성은 넌센스이며 이방원 또한 자신 가문의 정예사병들과 싸우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피해가 심했을 것은 자명했기에 이방원이 미리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 

그렇게되면 이방원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고 궁궐에 입성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에서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내의 다수가 이방원과 사전모략을 했다는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높다. 박위,조온,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들이 모두 투항한 후, 궁궐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들도 전세가 꺾였단걸 알고 투항해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들은 가별초를 포함한 이방원의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방원이 만일에 대비해 대군을 이끌고 왔을 가능성은 높다. 실록에서도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그래야 빠르게 투항할 것이고 수비대병사들 스스로도 납득이 갈테니까.

우발적으로 벌였다기보다는 이방원이 주도면밀히 계획했다는 느낌이 많이 난다. 자세한 정황과 명단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수비대 안의 상당수 인물들을 미리 포섭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일들이 이방원의 의지대로 처리된 후,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