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1728년 조선시대 영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는 호칭도 있는데, 총대장인 이인좌는 조기에 진압당한 반면, 정희량이 이끄는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영조가 집권한지 4년만에 일어나 이 사건으로 영조에게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는 주장이 많으나, 그런 의의에서 나왔던 탕평책은 정작 이인좌의 난의 영향으로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평도 나온다. 하여튼 영조 집권기에 큰 영향을 끼친 난.
경종 사후 영조가 즉위해, 집권한 노론의 서슬에 밀려 소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밀려난 소론 세력들은 경종의 의문사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고,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조정을 엎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들어서서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고 소론들은 당황했으나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계속 반란을 추진하니 이게 영조 4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이다.
계획은 삼남 지방인 충청도, 호남, 영남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 내의 동조세력이 호응한다. 경기군이 한양을 공격하는 동안 호남, 영남군이 북상하여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한양을 점령한다는 것. 왕위에는 소현세자의 자손인 밀풍군 이탄을 앉히기로 했다.
대원수로 뽑힌 이인좌는 윤휴의 손녀사위로 남인 명가의 출신이지만 관료에 진출할 수 없었던 인물로, 반란군에서 경기 지역의 군사를 맡았다. 사실 이인좌가 순전히 모든 반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주를 함락시키고 곧장 경기도로 진군하는 등 경기 지역에서 크게 항쟁했기 때문에 반란에는 이인좌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영남의 군대는 사족인 정희량, 호남의 군대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맡았다. 군사는 돈을 주고 산 용병과 점령지의 관군을 회유하여 구성되었다. 원래 평안도에서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고 서울에서 남태징이 내응하기로 했지만 이광좌가 재빨리 이사성, 남태징을 체포하여 평안도와 서울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가 기용되면서 반란 모의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등용된 이들이 반란 세력의 동태를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반란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반군은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들어와 청주의 충청 병영을 급습하여 충청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등 관리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목사와 병사를 세운 후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병마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여 청주를 장악한 다음 주변 고을인 목천과 청안, 진천을 통과해 안성, 죽산으로 진군하였다.
청주 반군이 안성으로 향하면서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 목천이었다. 목천 현감 윤취은은 3월 15일 관문을 닫고 이미 도주한 상태였고 반군은 가짜 목천 현감에 곽장을 임명하여, 목천 향소를 중심으로 군사와 군마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고 향소에 모인 군사들이 출발 즈음 사정을 알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목천은 이황의 제자인 영남의 거유 정구를 제향한 도동 서원이 소재할 만큼 충청 지역에서는 드물게 남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도동 서원에 제향된 정구는 말년에 목천 번자울에서 우거하며 목천의 선비들과 죽림 정사를 세워 강학 활동을 하였으며, 남인 김일손 역시 처향인 목천에 거주하고 있었고, 정구의 제자 황종해는 목천이 가향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목천은 남인 계통의 사족들이 활약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반군이 모병 지역으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안성과 죽산으로 진격한 반군은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이 사이에 청주 역시 상당성에서 궤멸되었다.
이인좌의 난에는 청주 주변의 고을 외에도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반군은 충청도 반군과 합류하려다 실패하였고, 전라도의 반군은 주모자가 체포됨으로써 반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영조는 도성 문을 폐쇄하고 도성 밖 관군을 동원해 서울을 방비하면서, 토벌군을 보내 반군을 소탕하였다. 반란 세력을 평정한 관군이 4월 19일 개선하자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