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12대 왕 인종

카우보이 비밥 2016. 5. 15. 15:54



조선의 12대 국왕.


인종 이호 (1515년 2월 25일 ~ 1545년 7월 1일)


재위기간 1545년 1월 13일 ~ 1545년 8월 7일(6개월 25일, 206일.)


중종의 장남으로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만 태어나기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 미가 먼저 태어났다. 따라서 장남이 아니라서 형제순서는 밀리지만 조선시대는 적서차별이 있었기때문에 중전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인종이 왕위를 이은 것.


정식 시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단, 여기서의 '~효대왕'이 인종만의 특별한 시호는 아니다. '효'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가 강한 군주들인 태종과 세조 역시 각각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효대왕'은 조선의 대부분의 왕 시호 끝에 붙는 말이라서 이걸 가지고 '흠효대왕'이 인종의 효성을 찬양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왕세자 시절과 즉위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꿈을 꿨었는데, 아기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인종을 낳은 뒤 위독해지자 이 꿈이 어떤 계시로 생각되었는지 중종에게 이름을 '억'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원자의 성명은 '이억'이 된다. 하지만 결국 세자에 책봉되면서 피휘를 위해 '호'로 개명했다.




3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등 어려서부터 엄친아의 기상을 풍겼으나 태어난지 며칠만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었고 이 때문에 세자 시절 상당한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어릴 때는 남곤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는 죽었고 아버지 중종이 각별히 아끼는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소생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경빈 박씨의 견제 때문이었다. 작서의 변으로 경빈이 몰락한 뒤에는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김안로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김안로가 세자의 후원자를 자처한 덕에 세자의 지위는 안정될 수 있었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 권력은 그의 의붓어머니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의 손에 넘어갔다. 문정왕후는 먼 친척이기도 하고, 아들을 낳기 전까진 필요에 의해서 세자를 감쌌지만, 경원대군(명종)을 낳게 된 뒤에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인종을 견제했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에 의문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인종이 죽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에 다르면 이 때 불이 나자 당시 인종은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를 기다렸으나(...) 밖에서 중종이 나타나 그의 아명인 백돌을 애타게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나아가 "불충")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증거는 없었으나 세간에선 문정왕후가 세자를 죽이려고 벌인 짓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중종이 죽은후 왕위에 올랐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 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등 중종때 좌절된 도학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압박받던 사림들이 환호했다. 또한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관이 자신이 기록하는 사초(실록의 원본)에 이름을 써넣지 않아도 된다는 옛 규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몸이 약했고 문정왕후의 도가 넘은 압박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야사 등에선 문정왕후가 인종을 늘 괴롭혔다고 하는데 경원대군과 함께 편전에 들어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작 인종 자신은 문정왕후를 극진히 우대하였고, 나이 차이가 아들뻘인 이복동생 경원대군과도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죽음

결국 9개월도 다 못채우고 인종은 죽고 마는데 독살설이 나돌았다. 인종에게 포악스럽게 굴던 문정왕후가 어느 날은 아주 친절한 모습으로 인종에게 오색떡을 권했는데 오색떡을 먹은 인종이 그날 쓰러져서 죽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인종이 죽게된 진짜 원인은 상례 도중 너무 단식을 오래 하여 거식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중종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때 침식을 거르며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이후에도 5개월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단식한 뒤 곧바로 제사니 사신접대니 하는 일정을 강행했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말렸을 정도. 이러니 몸이 남아날 턱이 있나... 죽기 1달 전인 6월 4일부터 실록에 기록이 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나 걱정이 되어 찾아온 신하들에게 괜찮으니 진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한달만에 죽고 말았다.


독살설을 배제하더라도 문정왕후의 압박이 인종의 건강을 해쳤을 개연성 또한 있다. 조선은 효(孝)를 숭상하고, 인종은 특히 매우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종이 문정왕후의 압박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불효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이 사건을 그 동안 이일역월제, 즉 하루를 한달로 치면서 3년상을 하는 편법으로 국정의 안정과 실용성을 꾀하던 조선 왕실이 점차 성리학적 예법을 신봉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야 조광조의 억울한 누명을 신원하라는 명과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승하했고 선조대에서 신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