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마지막 공주 - 덕혜옹주

카우보이 비밥 2016. 7. 14. 01:39



(일본에 강제 유학길을 오르는 나이 14세 이전. 히노데(日出) 심상소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이다. 얼굴이 정말로 할아버지를 닮았다)


다른 사진이 있다면




1912년 5월 25일~1989년 4월 21일


대한제국의 황족.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춘기(梁春基)의 소생으로, 고종황제의 고명딸이다.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으로, 보통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기억된다. '덕혜'는 1921년에 순종황제가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 올릴 때 '이덕혜'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흔히 이 덕혜옹주를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짜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4녀인 덕온공주(23세로 요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적자면 공주는 임금의 정처인 왕비의 여식(적녀), 옹주는 첩인 후궁의 여식(서녀)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지위에 따른 명칭 상의 문제고 통상적인 황제나 왕의 딸이라는 개념에서는 마지막 공주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덕수궁 석조전에서
(1918년)



고종황제가 60세일 때 얻은 늦둥이라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고종이 어린 덕혜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변 유모상궁(후술되는 변복동 여사)이 어린 덕혜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고종은 덕혜가 놀라거나 울까봐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주상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 덕수궁에 있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 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가 황적에 올려줄 기미가 없자,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고,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불러 유치원을 보여준 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무릎에 앉히며 "이 아이가 내 딸이다" 라고 직접 소개,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이 유치원의 보모는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유치원 졸업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양장을 착용한 모습

(1925년)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 라고 묻자 생모 복녕당 양 씨의 친정이 아니라 안국동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안국동은 바로 명성황후의 친정이 있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던 간에 모두 왕비의 자녀이기도 하였으므로 자신은 조선의 황녀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가 덕혜옹주를 이왕가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어딘가에서는 "고종황제가 순헌황귀비 사후에 여러 궁인들을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제는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후궁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후궁 소생들을 황실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신뢰성이 없다. 역시 동아시아의 왕실인 일본 황실부터가 후궁을 잔뜩 들이는 관습이 있었고, 덕혜옹주가 태어날 때 일본 천황인 메이지 덴노부터가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소생이다. 게다가 메이지 덴노 역시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정실인 쇼켄황후(昭憲皇后)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1명도 없고, 후계자인 다이쇼 천황을 비롯한 5남 10녀를 모조리 후궁들의 몸에서 보았다.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최초의 덴노는 다이쇼 덴노이며, 이에 비하면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모습

(1925년)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한 고종황제는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세상을 뜬 후 약혼은 깨지고,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서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함께 여자 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 여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 그리고 사가 히로 등이 있었다.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서

(1929년)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1930년, 어머니인 귀인 양 씨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로 인해 몽유병과 최초의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2가지 추측이 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와는 공식적으로는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 시기 즈음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후지마로(山階宮藤磨) 왕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의문사한 뒤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자 1931년 데이메이 황후에 의해,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소 다케유키과 덕혜옹주

(1931년)


민족 감정 때문인지 다케유키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니느니 꼽추라느니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느니 하는 소문에 시달렸다. 아예 부부가 나란히 찍은 결혼사진에서도, 다케유키는 지워버리고 덕혜옹주의 모습만 남겨 신문지상에 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케유키는 가쿠슈인 고등과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에 허우대도 멀쩡, 아니 오히려 미남으로 부부 사이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한쪽 눈이 사시였다고 하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신혼 초에는 각종 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표정도 밝았다고 한다.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마사에의 양육도 다케유키가 도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출산 후 다시금 조현병 증세를 보였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당시에는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고 다케유키 역시 아내의 병을 숨기기 위해서 집안에 감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실 일본 구 화족 축소에 따른 생활고 문제 탓이 컸다. 미군정은 대마도주 일가 등 많은 옛 화족 세력을 사실상 평민으로 만들었고, 그에 따른 특권 상실로 인해 생계유지가 어려웠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하여간 덕혜옹주의 병세는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46년에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1951년에 죽었고, 1955년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했다. 다소 의외인 사실로, 이 이혼은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여사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대신 오빠 부부인 영친왕ㆍ이방자 여사와 함께 협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뒤 다케유키 역시 한국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옛 아내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정부에서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선친들의 묘터에 함께 안장되었다.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이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 현과 나가노 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실종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어떠한 생존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처리되었다.




1962년에 되어서야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의 노력 덕에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을한은 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 밑에서 덕혜옹주를 돌보았던 유모 변복동 여사가 덕혜옹주를 맞이하였다. 변 여사는 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직접 만났을 때는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은 황실의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 되는 순정효황후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 되는 이우 공의 아내 박찬주 여사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본인이 조선의 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이후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올케 이방자 여사의 몫이 되었다.



귀국 이후에는 다른 대한제국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을 방문했던 전남편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고자 찾아온 일이 있었으나, 측근들에 의해 거절당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전처를 만나려 했던 시도였다. 그 외 덕혜옹주를 모신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신이 간혹 맑아지면 옛 상궁들과 화투를 즐기곤 했다고 하며, 의사 표현도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만 "싫어" 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1985년 前 남편 다케유키가 사망했다.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한다.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묻혔다.


덕혜옹주가 사망하고 9일 후, 올케 이방자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우리황실사랑회 등 대표적인 황실복원, 근왕주의 단체 및 모임에서 전주이씨종친회, 혹은 남양주시에 옹주의 제향을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전자는 말 같잖은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후자 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란 이유로 이뤄지지 못해 우리황실사랑회가 이갑 황손으로부터 일임 받아 추모제향을 지냈다. 2014년 4월 제향부터 전주이씨 종친회에 제향 업무를 이관하였다.


2015년 6월 24일 일본으로부터 덕혜옹주가 입던 한복 유품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