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wboy Bebop
조선 19대왕 숙종 본문
조선의 제 19대 임금.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적장자의 수난이라는 유서 깊은 징크스를 깨부순 유일한 사람. 이자 환국 정치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가진 대표적인 조선 후기 임금 이다.
살아온 인생 자체가 막장 드라마 .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그는 왕비를 3번 들였는데 그 중 2번째 왕비가 저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 되겠다.
주로 사극의 인기 소재인 희빈 장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이 잦은 군주로 드라마에서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다혈질에 정치판에서는 얼음같이 싸늘하고 냉철한 고단수 정치가로, 결코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나약한 왕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치판에서도 유감없이 그 성질을 드러내셨으니 냉철과 다혈질이 합쳐진다면 말 그대로 머리도 갖춘 신하 갈구는 임금이 된다는 거다.
즉위 당시엔 14세라 약간 어린 편이고, 모후인 명성왕후, 계증조모 자의대비가 생존했으므로 수렴청청을 해도 되었지만 즉위하자마자 권력을 휘어잡고 친정을 할 정도였다. 오히려 처첩비빈 사이를 오가며 아내들을 환국에 이용했다는 평. 이런 상태로 장장 46년을 재위하며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본래 휘는 '광(爌)'이었으나 현종 7년인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양광)과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 '불이 성하다', '광명을 밝히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아버지인 현종도 부왕인 효종의 고명아들 이었고, 자신도 정실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고 딱히 외척에 관련한 트러블도 없어 정통성에서는 꿀리는 게 없는 왕이었다. 꿀리기는 커녕, 부계와 모계 정통성이 모두 완벽한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때, 세조같이 왕위를 찬탈할 백숙부도 없었고, 연산군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대군도 없었다.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세자-왕 순서로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장수한 왕이다. 한 성깔하는 건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게 키웠겠는가. 숙종의 그 성질머리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수도 있겠고 그런식으로 생각하면 따지고 보면 예송논쟁도 현종의 후손이 1명밖에 없다는 이유도 있을수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왕비-대비 테크를 제대로 밟았다.
문종과 인종과 헌종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연산군은 반정으로 축출되었다. 원손-세손-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쉽게 말해 날 때부터 모든것을 다 타고났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도 정말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면에서 꿀릴게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환국(換局) 정치
숙종의 면목은 바로 환국정치의 창시자로 인조반정 이후 현종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에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혈투를 벌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 이로 인해 집권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시기를 XX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 1675년, 예송논쟁 직후 긴장상태에 있던 정국을 남인 우위로 뒤집었다.(사실 현종 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 6년만에 1680년 경신환국으로 허적,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친위쿠데타에 가깝게 몰아냈다. 처분 수일만에 사약크리.
-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등용.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 이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숙종 17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니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 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내시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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