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wboy Bebop
효명세자 본문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세자. 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 헌종이 익종(翼宗)으로 추존했고 고종은 1899년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로 다시 추존했다. 그래서 효명 익황제라고도 한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참으로 정말 오랜만에 정식 왕비 소생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 정식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 경종은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일단은 서자였고, 영조와 사도세자는 후궁 소생이다. 정조는 정실 소생이긴 하지만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고, 순조는 후궁 소생이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헌종을 낳았다. 그의 아내가 후에 고종때 잠시 섭정을 맡는 신정왕후 조 대비다.
외모가 출중했고 대단히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한마디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있던 아버지 순조도 많은 기대를 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의 제작에 관여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라는 해석을 한다.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환영하였을 정도로 기대를 받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세종 때는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 이 놈들아!"라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노론이야 좋아했지만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었다. 영조 때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반대했다. 근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팔을 벌려 환영하며 왕의 서무 명령 비망기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이때 아직 20살도 채 안되었다)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으며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그때까지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하였다.더불어 판서급,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등의 주요 연회들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태양왕으로 불르며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견주기도 한다. 칼춤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이사람.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덕일을 필두로 한 일각에서는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사실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졸)이 아직 살아있던 시점이나, 각혈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썼으며 재야에 있던 정약용까지 부르려고 했던 점을 보면 딱히 독살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순조가 직접 쓴 제문을 보면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절절히 느껴진다. 안 그래도 몸에 병이 깊어지는데 효명세자의 뒤를 따라가듯 순조의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 두 해 뒤인 18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영조의 방계 자손인 철종이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지만 고종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자손이라 안습.
추존 문조, 즉 효명세자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에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1890년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