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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사관생도 화랑 본문

역사

신라시대 사관생도 화랑

카우보이 비밥 2016. 8. 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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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라에 있었던 일종의 아이돌이자 대학생이자 지휘관격인 엘리트 집단. 신라시대의 사관학교 생도 정도의 지위이다. 시작은 진흥왕 때로 기원은 미스코리아처럼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둘을 뽑아 아이돌처럼 삼아서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 제도였는데, 두 원화 남모와 준정 간에 서로 간의 시기심으로 살인이 일어나자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서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다. 다만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하였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이 존재는 했고 576년의 기사는 화랑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화랑들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를 거느리고 지휘했으며, 신라 땅 이곳저곳 깊은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모험과 수련을 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학도병마냥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기초적인 귀족교육을 수련하는 유년 사관생도 정도의 이미지를 지닌다. 무력 쪽 이미지가 강하지만 학문적인 수련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10대 소년들이 많았으며 동성애적인 코드를 지닌 전형적인 고대 청년 집단의 성향이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눈에 붉은 화장을 칠한 미소년 집단이라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남자가 화장하는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고.... 일본 일부 사학에서는 화랑도를 동성애 집단으로 간주하는 연구가 몇 차례 있었다. 우리나라 사학에서는 이를 일본의 저질 음해 및 왜곡으로 치부하는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화랑에 대해 비난한 부분을 들어 재반박한 경우도 존재한다. 실제로 한국 사학계는 과도하리만치 성(性)과 연관되는 것을 터부시한다는 점은 지적되어 왔다. 화랑에 동성애적 사실은 없다는 입장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화랑이 전쟁에 나타나는 사료를 바탕으로 무사집단으로 보았으며, 현대에는 귀족자제 출신인 화랑과 하층민 쪽 출신인 낭도가 모인 청년 집단으로 본다., 여기에 추가로 종교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고 보는 정도이다. 주로 난랑비서문, 화랑이 신궁제사에 참여하거나, 국선(國仙)이라는 호칭이나 용화향도라는 기록 등에 근거하는 것인데, 고대사회에서 종교의례의 집전은 지배층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지도.


이러한 미성년 남성들의 집단생활이나 단체 활동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습속이며 남방계 원주민 아이들의 합숙이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또래집단, 독일의 부르센샤프트 즉, 소규모봉건집단에서의 우두머리(마스터)의 집에서 생활을 하는것, 그리고 일본의 와카슈 전통에서 나타난다. 특히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성도 아닌 연령의 남자, 즉 와카슈(약중)를 자연의 거친 성질로 비유한 황신荒神의 대표자로서 인식하고 이들을 이끄는 와카슈 가시라(약중두)를 정점으로하여 마을생활의 한축을 담당하게하는 일본식 와카슈 전통은 화랑의 판박이라 할수 있다.


화랑의 화장하고 산천을 떠도는 행위는 바로 이 숭신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들이 전사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의 물리력의 대표로서 사역하는 일이 된다.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서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서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 :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림이 있다.


도덕 교과서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속오계를 숭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 이게 화랑 전체의 계율이라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계율을 사사받은 건 사실이나 화랑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젊은 지식인으로서 삶의 지침을 청해 받은 것에 불과하다. 헌데 신라시대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랑으로 치부하게 화랑 전체의 규율로 소급시켜 버린 것이다. 다만, 김원술의 예를 보면 아무 상관없는 건 아니고 꽤 널리 알려진 계율이긴 했던 듯하다. 


화랑의 수장이 풍월주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나 우두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풍월주라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삼국유사에 국선(國仙)이라 나온다. 여기에도 풍월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풍월주라는 명칭은 15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 여러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물론 화랑세기와 교차검증을 하였으나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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