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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wboy Bebop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사건이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재난, 변괴를 뜻하는 '화변'으로 명명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엄밀히 말하면 뒤주에 갇힐 당시 폐서인이 됐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신분은 세자가 아니었다. 하루에 한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 째 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8일 만에 죽었지 실제론 세자는 전날에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체를 꺼내 확인한 것이 8일째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사도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기록에는 세자가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한다. 에 따르면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인 의대증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1벌을 입기 위해 10벌에서 20벌 ~ 30벌을 지어 올려야 했으며, 의대증이 있어서 옷을 입기 전에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했다는 등 1벌을 순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가까스로 1벌을 입으면 그 옷이 해지도록 입었다고 하니… 시중 드는 나인들에게 불똥이 튄 것은 당연한 수준. 그 목을 자르고 자랑처럼 보여준다 하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정신 의학계에서는 의관을 갖추면 아버지를 찾아 뵈러가야 한다는 사고가 강박증으로 발전하여 의대 질환으로 발현된 것이라 보는데, 이쯤 되면 기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조선의 초대 국왕.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초명은 이성계(李成桂)로, 세간에는 다른 역대 국왕과 달리 태조라는 묘호보다는 이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 후에 대한제국의 고종이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다.사방팔방에서 헬게이트가 열리며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멸망한 원나라의 군벌, 역사상 최악의 패악질을 부렸던 왜구, 그리고 심심하면 침입했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었던 적들을 상대로 전부 승리하고 수만 명씩 개박살을 내버린 인간흉기다. 한마디로 왕이 되지 않았어도 이순신과 쌍벽을 이루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명장'으로 칭송받았을 위인. 그러..
조선의 추존 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휘는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영조의 차남이며 정조의 아버지. 모친은 영빈 이씨.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 역사에선 영조와 갈등 끝에 뒤주에 갇혀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철종 때의 정식 시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세자'였지만 정조가 장헌(莊獻)을 시호로 추가했고, 이후 16글자의 존호를 올렸다. 이후 철종이 8글자의 존호를 올리는 바람에 정식 시호가 길어졌다. 그래서 그는 장헌세자라고도 불린다.고종 황제는 1863년 즉위한 뒤에 사도세자를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는 장조의..
조선시대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조선의 지도.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어있다. 프로토타입은 그냥 '동여도(東輿圖)' 라는 이름의 판각지도로 한국의 옛지도중 가장 정밀한 지도라고 한다. 제작시기는 철종7년인 대략 서기 1856년에서 1861년 사이이며 한 장의 축척은 가로 80리/세로 120리. 사실 동여도는 얼마전까지도 누구의 지도인지 설이 분분하다가 최근 들어서야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프로토타입이라는 설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축적은 동여도와 동일하며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 제책한 책은 213면의 꽤나 두꺼운 지도가 됐으며 여기에 부록지도가 몇장 더 추가된 모습이다. 이는 지도의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 지도를 모두 합치면 대략 가로 360c..
조선 말기의 지도 제작자이자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오늘날 현존하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의 태생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잔반이나 중인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실학을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그는 최한기와도 교류하였으므로 김정호는 최한기가 편찬한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맡았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편찬한 청구도의 서문을 써주었다. 그외에 김정호를 후원한 인물로는 김정호도 참여한 여도비지를 편찬한 최성환의 대동여방도 서문을 썼으며, 김정호에게 지도제작을 의뢰한 신헌 등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성부 종로 쪽에 살았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