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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wboy Bebop
장녹수, ? ~ 1506 조선 연산군의 후궁.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의 아버지는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언니는 내수사의 공노비였다. 따라서 얼녀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보로 유명한(...) 제안대군의 가노로 춤과 노래에 능했다고 한다. 시집을 두 번 갔던 유부녀에 아이가 딸려 있었다는데, 어떤 경위인지 일이 잘 풀려서 연산군의 눈에 띄어 입궐하였다. 처음에는 종4품 숙원에 봉해졌고 그 후 종3품 숙용까지 간다. 엄청난 동안이라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10대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고 하는데... 기록을 보면 연산군의 아명을 부르며 때리고 꼬집고 조롱했다고 하니 대체 저게 어떤 식으로 비위를 잘 맞춰준 건지 의문이다(...) 연산군의 마더콤 의혹을 ..
연령군 延齡君 (1699~1719) 본명은 이훤(李昍)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본관은 당연하지만 전주 이씨. 조선 숙종과 명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숙종의 6남이다. 훗날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과 함께 숙종의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나 숙종이 연령군을 총애했는지 경종의 자리를 위협하던 연잉군의 자리가 연령군에게 위협당했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다. 연령군의 숙배 때 늦은 이조정랑 조도빈은 바로 파직당했을 정도. 하지만 연령군은 그저 정치와 무관한 사랑용 아들이란 주장도 있다. 5세에 그의 생모인 명빈 박씨가 죽었는데 숙종은 주상자가 된 연령군을 서둘러 군에 봉했다. 군은 원래 6세 이후에 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대가 있었으나 상대가 누군가? 천하의 숙종이다. 반대하는 대간들을..
貞明公主 1603년 5월 19일 ~ 1685년 8월 10일 조선의 공주로,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딸. 영창대군의 동복누나. 선조의 딸 10명 중에서 막내딸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이다. 늦둥이에 유일한 적녀이니 아버지 선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나이 차로는 아버지 뻘인 이복오빠 광해군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공주이기 때문인지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잉태되었을 당시 대군이 태어날 것을 염려한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에 의해 낙태 시도가 있었다고 하나 다행히도 무사히 태어났다. 또한,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 대군이 태어났다고 소식이 잘못 전해졌는데, 유자신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가 공주가 태어났다고 정정하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예물을 진상했다고 한다. 또한 정명공주는 11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고..
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숙종과 영조 사이에 낀 임금인데다 재위기간이 짧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는 왕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나긴 영조 시대를 설명하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빼놓을 수 없는 왕이기도 하다. 출생과 성장숙종의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 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시절을 보냈다..
여러장의 긴 종이의 패로 이루어진 조선 시대의 전통 플레잉 카드. 투패이라고도 한다. 청성잡기에 따르면 역관인 장현(장희빈의 당숙)이 북경에서 여진산 마조를 숭정제(1628~1644) 연간에 우리나라에 구입해 왔다고 한다. 이 투전은 마조를 고쳐 만든 놀이인데, 장현이 마조의 패 120개를 80개로 간략화했다고 한다. 어찌 됐든간 조선의 노름판에선 80장으로 간략화되어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놀이에 따라서는 80장 전부를 쓰지 않고, 60장, 40장, 25장 덱을 쓰기도 한다. 너비는 작은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15센티미터 정도이고, 기름을 먹여 손을 타도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이 때문에 '엿당처럼 말랑말랑한 커닝 페이퍼'의 의미라는 엿방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 면에는 그림 또는 글자를 흘려 적어..
典獄署 고려, 조선 시대에 감옥운영에 대한 사무를 맡은 부서이다. 고려 건국시부터 운영했으며 성종 치세 말기인 995년에 대리시(大理寺)로 이름을 바꿨다가 문종 대에 다시 전옥서로 바꾸고 정8품의 영(令) 1명과 정9품의 승(丞) 2명이 관리하게 하였다. 충선왕 연간에 폐지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영은 종8품, 승은 종9품으로 종전보다 1단계 내려갔다.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이 완비되면서 우부승지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종6품 주부(主簿), 종8품 봉사(奉事), 종9품 참봉(參奉) 각각 1명씩 담당하였다. 형조, 의금부에서 추국할 중죄인은 물론이고 태형, 장형 정도로 처리될 잡범들도 수용되었으며 전체 수용인원은 대략 1백명 정도였다. 본래 미결수를 처리하는 시설이라 죄인이 유형이나 도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