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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대 악녀 여태후 본문

역사

중국 3대 악녀 여태후

카우보이 비밥 2016. 4. 2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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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呂雉)

(BC 241~BC 180)


전한 고조(고제)인 유방의 처이자 황후. 명문 여(呂)씨의 후손이다.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 고황제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 그리고 중국 최초의 황후이자 황후-최초의 황태후-최초의 태황태후 삼단코스를 밟은 여인이다. 



보다시피 이름 자로 꿩 치 자를 쓴다. 때문에 한나라 당대에는 피휘하여 꿩을 가리킬 때 雉(치) 대신 野鷄(야계, 들닭이라는 의미)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사기의 본기 제목으로 쓰인 여태후라는 성+지위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부유한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이 할일 없이 패현에서 배때기나 벅벅 긁고 굴러다니는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 억지로 주겠다 주겠다 애원해서 시집보냈다고 전한다. 미인이지만 기질은 꺽달지고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서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놈이 뭘 어떻게 할거냐. 죽일 테면 죽여봐. 너 따위는 내 남편한테 개털릴 거임'이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같이 포로가 된 유방의 부모와 항우를 벙찌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했다.

유방이 완전 철저하게 개털릴 때에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했으며, 결국 아버지가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 때부터가 진짜 잔인무도함의 시작.





토사구팽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은 한신, 팽월, 경포 등 무위가 있는 개국공신 출신 이성제후왕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거기에 유씨 황족들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유방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려 하였다.팽월도, 한시ㅣㄴ도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후가 나서서 처단했다. 또 다른 모반한 이성제후왕인, 옛 유방의 불알친구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후는 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 못했고, 유방이 쾌차하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거기에다 그녀는 한술 더 떠 유씨들마저 뽑아버리고 여씨 일족으로 채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이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유방의 생각은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쳤으며, 여후는 신선술을 배운다는 명분을 세워 숙청의 피바람을 모면한 장량과 손을 잡고 당대의 은둔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와 유방 앞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도 꽤 심한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하였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지 묻는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한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내정은 진평에게 맡기고 군사는 주발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기가 차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러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3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계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궁궐에 입궐한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서는,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와 침식을 같이 하며 자신의 옆에 끼고 보호했다. 혜제의 혼신을 다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고, 음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놓고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 꼬라지를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들이 척부인과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쎄빠지게 노력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광경을 보고 만 혜제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한 후 슬슬 정치에서 손을 놓기 시작했고, 이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대부분 여록과 여산과 같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맡겼다. 이 탓에 유공이 성장하면 보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 유공을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이 때는 명목상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도 연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독.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라고 한다.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서장자인 제왕 유비도 혜제와 건배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 해서 먹이려다 되려 자기 아들내미가 그 잔을 잡고 마시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엎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비는 여후의 친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상당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나마 제도혜왕은 운이 좋은 편. 조은왕은 짐주에 갔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태후에게 잡혀서 굶어죽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공왕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겼으며 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씨 왕후가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뺏어 자기 조카 여록에게 주었다. 유방에게는 또 다른 서자 연영왕 유건이 있었는데, 서자를 남겨놓고 죽었지만 여태후는 그를 죽이고 또 다른 자기 조카 여통에게 연나라를 주었다.

유방의 여섯 아들, 제도혜왕, 혜제, 조은왕, 조유왕, 조공왕, 연영왕이 다들 여후 때문에 인생을 망친 셈. 그나마 문제와 회남여왕 유장만이 멀쩡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머니 박씨가 유방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에 질투를 피해갔었고, 두 동생 조유왕과 조공왕이 횡사한 후 여태후가 조나라 왕위를 제안하자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회남여왕은 어머니 조씨가 여태후의 독한 질투에 자결로 응수하는 바람에 여태후가 키워줘 그나마 정이 있었던 듯.


실로 무섭지만 추진력 있는 여장부였는데, 말년에는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개에 물리는 환상체험 후에 병을 앓더니만 죽었다. 죽으며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나 기타 추종세력이 달려들테니 조심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뒤를 잇는다는 놈들이 모조리 함량 미달 찌끄레기들. 결국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왕릉-주발-진평 등의 유방 직속 공신과 다른 유씨들이 들고 일어나 일족이 몰살당했다. 이 때 같은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동생 여수도 죽고 말았다.

이 때 주발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분위기를 봐도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을수가 없었겠지만.

후일 한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기에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할 때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는데 이때 시체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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