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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0대 왕 경종 본문

역사

조선 20대 왕 경종

카우보이 비밥 2016. 5. 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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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숙종과 영조 사이에 낀 임금인데다 재위기간이 짧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는 왕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나긴 영조 시대를 설명하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빼놓을 수 없는 왕이기도 하다.

출생과 성장

숙종의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 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무수한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 희빈 장씨까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이 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쌩깠다. 거기다 생모가 사약을 받는 와중에도 법률상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켜야했으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1716년의 병신처분으로 2년전 죽은 윤증이 추탈되면서 상황은 그로기로 몰렸다.

대리청정기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누워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의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정유독대),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통해 세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종의 대리는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 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기록에 보면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경종의 답변은 "유의하겠다"였다. 

다만 딱 한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늦게 입시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신하가 되서 너희들이 이렇게 날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 여섯 승지들을 모조리 나문해라!' 하며 폭발적으로 화를 낸것. 돌발 상황에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고, 공포에 질린 승지 및 사관들은 데꿀멍하여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푼 세자는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를 하라 했다. 아마도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에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고 연령군, 연잉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갈릴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의 태자가 교체되었고,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이 앓아서 누워있는데다 대리청정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세자를 함부로 바꾸자고 나오기 어려웠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숙종이 "내가 아파서 왕노릇을 못해먹겠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 좀 시키는게 어떠냐?"라고 하자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즉각 찬동하면서 세자의 능력을 칭찬했는데 그동안 反세자임이 분명했던 노론이 이러는 것이 너무 냄새가 나서 소론 대신 영부사 윤지완 등이 도끼상소를 하는 등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쨌거나 꿀리는 것이 있었는지 숙종은 "말 좀 가려하지..."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예 노론에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큰 실책을 저지르길 기다렸다가 이를 빌미로 공격하려 했는데 세자가 큰 사고없이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나가다 보니 "어?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있다가 실패했던 셈이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재위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도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못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 심지어 대리까지 주장했다. 이 대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또 다음해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삼수의 옥)가 발생했다. 이렇게 신축년, 임인년 두번에 걸쳐 대숙청인 신임옥사가 일어난다. 이 과정이 경종의 태도변화와 맞물려 매우 드라마틱 하므로 항목 참조. 일부에서는 경종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고, 알려진 해석들은 병약한 경종이 소론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상당하다. 경종이 노론의 변명에 태도를 돌변하여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든지...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도 경종은 한번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영조의 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경종은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여 '늬들 내가 호구로 보이냐 다들 사표쓰고 꺼져!'라며 일갈을 토해냈다. 

당황한 소론은 싹싹 빈 끝에 겨우 경종의 화를 가라앉혔고, '우리도 너무 나대나가 노론처럼 싹 갈리는거 아냐?' 하는 불안감에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준론 - 김일경 등)와 온건파(완론)의 분당이 일어났다.



과소평가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보는 바와 같이 얌전해 보이면서도 신하들을 쥐어잡을 때에는 확실히 쥐어잡았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간질 하고 실제로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을 수 있음에도 왕실의 리더로서 똘똘하고 자신 다음의 정통성을 갖춘 동생 연잉군을 지켜줘서 아들이 없었음에도 왕위 계승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어머니 문제, 자신의 좋지 못한 건강,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던 동생, 갈라져 있던 조정의 분위기등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숙종과 영조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 속에서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 3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대리청정시절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양전사업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와문진종(시계)을 들여온 것도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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