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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 본문

역사

정명공주

카우보이 비밥 2016. 5. 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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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明公主
1603년 5월 19일 ~ 1685년 8월 10일


조선의 공주로,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딸. 영창대군의 동복누나. 선조의 딸 10명 중에서 막내딸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이다.

늦둥이에 유일한 적녀이니 아버지 선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나이 차로는 아버지 뻘인 이복오빠 광해군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공주이기 때문인지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잉태되었을 당시 대군이 태어날 것을 염려한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에 의해 낙태 시도가 있었다고 하나 다행히도 무사히 태어났다. 또한,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 대군이 태어났다고 소식이 잘못 전해졌는데, 유자신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가 공주가 태어났다고 정정하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예물을 진상했다고 한다. 

또한 정명공주는 11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고 하는데,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 측 북인들은 그것을 매우 기뻐한 듯하다.(...) 당시 천연두에는 칼질이 안 좋다는 미신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토막도 안 내 보내던 고기를 일부러 근처에서 칼질해 보낼 정도였다고. 공주는 광해군의 왕위 경쟁자가 될 수 없으므로, 공주가 죽기를 바란 것보다는 사실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이 천연두에 옮아 죽기를 바란 것이리라 추정된다. 

아버지 선조는 정명공주가 6살, 영창대군이 3살일 때 죽었다. 이후 외조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 하여 벌어진 계축옥사 후, 어머니 소성대비가 서궁(덕수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 역시 서궁에 유폐되었다. 서인으로 궁에 두지 말고 사가로 내보내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자, 정명공주마저 빼앗길 것을 염려한 소성대비는 정명공주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옆에서 큰 글씨 작은 글씨를 썼다고 한다. 남겨진 서예 작품은 '화정(華政)' 두 글자 등이 전해지는데, 남구만은 이 작품의 발문을 쓰면서 "선조의 글씨를 본떠 규합의 기상이 전혀 없다"고 평가하였다. 어쨌든 어머니가 유폐될 때 그녀 역시 옹주로 낮춰지고 같이 유폐되었다. 

사실 정명공주가 서궁에 유폐된 1618년에는 이미 공주의 나이 16세로, 조선시대의 왕녀들이 보통 10세 전후에 부마감을 간택하던 것을 생각하면 공주가 그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이 미뤄지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들을 빼앗기고 친정이 몰살당한 인목왕후가 딸도 곁을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혼인을 미루었든지, 인목왕후의 사위이자 영창대군의 자형이라는 지지세력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광해군이 일부러 공주를 혼인시키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다. 아무튼 정명공주는 유폐된 이후에도 혼인하지 못하고 계속 서궁에 갇혀 지내게 된다. 

인조반정 후 복위, 당시로서는 결혼도 어려운 노처녀에 들어갔던 21세 때, 3세 연하의 영안위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하여 7남 1녀를 낳았다.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이다 보니 나이 비슷한 남편감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연하를 구했다고 한다. 그것도 이미 홍주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파혼시키고 결혼한 것이라 한다. 사실 공주와 그나마 비슷한 나이의 남자들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이유는, 혼인하기 어려운 하자가 있었거나 이미 혼인은 정해져 있었으나 사정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는 경우밖에 없다. 그렇다고 공주를 문제 있는 남자와 혼인시킬 수는 없었으니 정해진 혼담이 있는 남자들이라도 전부 부마 단자를 내게 해서 부마를 구한 것이라 한다. 

소성대비는 노처녀 딸이 겨우 얻은 사위를 예뻐했던 모양으로, 사위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 비판 받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즉위의 대의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였다. 일제감정기까지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정명공주가 받은 땅이다. 소성대비 사후 그녀의 처소에서 흉측한 백서가 나와 이에 연루된 정명공주의 궁녀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수차례의 형문은 물론이고 압슬, 낙형까지 당해 고문치사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인조 사후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대접 받고 살았다.

83세에 사망.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사도세자의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손으로, 한중록에서 종종 이를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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