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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wboy Bebop
조선의 왕족. 密豊君 李坦, 1698년 ~ 1729년 이름은 탄(坦). 소현세자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다. 경안군의 장남인 임창군의 장남이 밀풍군(密豊君)이다. 현종 때 경안군이 복권된 이후, 효종계의 왕들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래도 왕실에서 상당히 잘해주었다. 석견의 두 아들은 한 때 역모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실록에서 임창군 졸기에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석견의 장손인 밀풍군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사절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평온하면서도 승승장구하..
고려와 조선 시기 왕명을 받들어 중대한 죄인을 수사하던 기관. 사극에서 '저 놈의 주리 틀어라'라는 대사가 나오면 100% 의금부로 끌려간거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보자면 검찰청, 경찰청, 국정원의 여러 면모를 섞어놓았다고 볼 수 있는 조직. 금오(金吾)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간섭기 충렬왕이 치안을 담당하고자 편성한 순마소가 그 시초이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순마소는 순군만호부로 명칭이 바뀌어 그 명맥이 유지된다. 조선 초에는 고려 때처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업무를 주로 맡았지만 이후 조선의 관제 및 법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수사 기관으로 역할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태종 때 이르러 드디어 의금부라는 이름을 얻게 됐으며, 킬방원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한다. 각종 사화가 많았던 연산군 시기에는 ..
조선시대 죄인의 심문과 도적의 포획 및 도적·화재 예방을 위해 순찰 등의 일을 맡았던 관서.일명 포청이라고도 한다. 좌포청은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재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에, 우포청(은 서부 서린방혜정교 남쪽(현재 종로구 종로1가 89번지 일대)에 있었다.현재 우포도청 건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울 성북구 돈암동 512의 60번지에 이건되어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속대전≫에 의하면 ≪경국대전≫ 이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명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성종 초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조선 초기 사법기관으로는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등이 있었다. 문종 때부터 포도전담관을 설치하자는 논..
유명 무실한 궁중 숙위를 담당했던 내상직을 정리, 개편하여 조직한 왕의 친위군 혹은 금군이다.처음에는 태종의 신임을 받는 수하병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그 수가 불과 60∼90인에 지나지 않는 정예 부대로서, 내금위절제사에 의해 영솔되었다. 그 뒤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1424년(세종 6) 내금위와 같은 임무를 띠고 있던 내시위를 통합해 그 수가 200인에 이르렀다.이들은 교대로 근무하는 병종이 아닌 장번군으로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주로 양반 자제로 편제되었으며, 다른 병종보다는 후대하였다. 『경국대전』이 성립된 당시에는 3인의 내금위장이 통솔했고, 190인 정원이 모두 체아직을 받고 있었다.이들의 주된 임무는 왕을 직접 호위하는 것이었으나, 무재가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장길산(張吉山, ?~?)은 조선 숙종 때의 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 장길산에 관한 기사가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생몰 연도나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특히 1697년의 실록 기사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이다. 하나는 169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의 반역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된 부분이다. 특히 1697년의 실록 기사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한 작자 미상의 도참서. 고려시대 십팔자위왕 예언의 후속작.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래서 이름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이라는 제목 때문에 세간에는 정도전이 저술했다고도 하고, 혹은 정여립이 저술했다고도 하지만 설득력은 없다. 혹은, 정몽주나 그의 후손이 썼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 건국 당시 흉흉한 민심가운데 이 책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정확하게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영조, 정조 시대때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정조 9년에 일어난 이율, 양형, 홍복영의 모반사건(정감록 모반사건)에 정감록이 등장하는게 확실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전에는..